퇴근 후 맥주 한 캔 들고 원령공주를 다시 봤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직접 탐방했다는 섬이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날 따라 유독 선명하게 꽂혔다. 그날 밤 비행기 티켓을 뒤적였고, 일주일 뒤 새벽 5시에 나는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야쿠시마(屋久島). 7,000년 된 나무가 살아 있는 섬.
야쿠시마는 어떤 곳인가
야쿠시마는 가고시마에서 남쪽으로 약 135km 떨어진 섬이다. 면적은 제주도의 약 4분의 1, 둘레 132km.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섬의 3분의 2가 원시림이다.
이곳의 유명한 말이 있다. "야쿠시마는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체감상 그렇게 틀리지 않다. 연간 강수량이 산간부 기준 1만mm를 넘기는 날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덕에 섬 전체가 촉촉하고, 그 촉촉함이 이끼를 키우고, 이끼가 삼나무를 키운다.
- 인구: 약 2만 명
- 야생 원숭이: 약 2만 마리
- 야생 사슴: 약 2만 마리
사람과 동물이 같은 수로 공존하는 섬. 사슴이 도로 위에 서 있고, 원숭이 가족이 숲 가장자리에서 풀을 뜯는다.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야쿠스기란 무엇인가
삼나무의 평균 수명은 약 500년이다. 그런데 야쿠시마의 삼나무들은 1,000년을 훌쩍 넘긴다. 비결은 역설적으로 '영양 부족'에 있다.
야쿠시마의 토양은 화강암 기반이라 물이 빠르게 빠진다. 물이 금방 빠지니 삼나무는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다. 대신 세포 조직이 치밀해지고 수지(樹脂, 나무진)가 풍부해진다. 결과적으로 병충해와 부패에 강한 나무가 된다. 수명이 1,000년, 2,000년, 3,000년을 넘기는 이유다.
야쿠시마에서는 수령 1,000년 이상 삼나무에만 '야쿠스기(屋久杉)'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야쿠시마의 '야쿠(屋久)'와 삼나무를 뜻하는 '스기(杉)'의 합성어. 그 이하는 그냥 '코스기(小杉, 작은 삼나무)'다. 천 년을 살아야 이름값을 하는 섬이다.
조몬스기: 7,000년을 산 나무
야쿠시마의 핵심은 조몬스기(縄文杉)다. 수령 약 7,200년으로 추정되는, 현재 살아 있는 나무 중 일본 최고령이다. 높이 25.3m, 줄기 둘레 16.4m. 나무 앞에 서면 그냥 조용해진다. 말이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아라카와 등산구에서 출발해 왕복 약 22km, 소요 시간 10~12시간. 중간에 화장실 없음. 매점 없음. 오로지 나무와 이끼와 계곡뿐이다.
조몬스기 트레킹 코스 요약
- 아라카와 등산구(荒川登山口) → 출발점. 옛 벌목용 삼림철도 선로를 따라 걷는다
- 윌슨 그루터기(ウィルソン株) →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잘린 거목 그루터기. 둘레 13.8m, 내부가 텅 빈 공간으로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트 모양이 된다
- 대왕스기(大王杉) → 수령 약 3,000년, 높이 24.7m. 조몬스기 발견 전까지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졌던 나무
- 부부스기(夫婦杉) → 두 나무가 하나로 붙어 자란 연리목
- 조몬스기(縄文杉) → 전망 데크에서 관람. 직접 접근은 금지돼 있다
입장·교통 비용
- 야쿠시마 자연관까지 버스: 별도 요금
- 등산버스(야쿠스기 뮤지엄↔아라카와 등산구) 왕복: 1,400엔
- 환경 보전 협력금: 1,000엔
- 합계: 2,400엔 (약 22,000원)
시라타니운수이쿄: 원령공주의 진짜 숲
조몬스기 트레킹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시라타니운수이쿄(白谷雲水峡)부터 시작하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방문해 원령공주의 배경으로 삼은 계곡 지대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코다마"와 "원시림 속 숲의 정령들"을 그려냈다고 한다.
입장료 500엔, 코스는 30분~3시간 30분으로 체력에 맞게 선택 가능하다. 등산화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난이도의 코스가 있어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에게도 추천한다.
- 이끼 덮인 산길, 흔들다리, 청록빛 계곡
- 쓰러진 나무 위로 이끼가 쌓이고, 그 위에 새 생명이 돋아나는 모습
- 원령공주 장면이 떠오르는 하얀 안개 속 삼나무 숲
야쿠시마 이동 방법
본토에서 야쿠시마까지
- 항공: 가고시마 공항 → 야쿠시마 공항 (프로펠러 비행기 ATR72, 약 35분). 스카이마크 운항. 비용은 국제선에 버금갈 만큼 비싸지만 시간이 절약된다
- 페리: 가고시마 항구 → 야쿠시마 미야노우라항. 고속선 약 2시간, 일반 페리 약 4시간
섬 내 이동
렌터카가 사실상 필수다. 버스는 1시간에 1대도 오지 않는 정류장이 대부분이다. 타임즈카(タイムズカー) 회원카드가 있으면 일본 어디서든 예약과 반납이 편리하다.
야쿠시마에서 먹을 것
이 섬의 명물 식재료는 날치(토비우오, 飛び魚)다. 날치회, 날치탕, 날치 함박스테이크까지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 식당 아주머니가 "갈치가 이 섬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말해줬다—날치를 갈치라 부르는 지역 어투였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날치 메뉴를 시키면 된다. 날치 함박스테이크는 990엔 정도.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야쿠시마 식당들은 오후 5시가 되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저녁 먹을 계획이 있다면 해가 지기 전에 찾아나서야 한다. 섬에서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미야노우라(宮之浦) 쪽에 식당이 집중돼 있다.
- 날치 요리: 날치회, 날치 함박스테이크(990엔~)
- 흑돼지(가고시마산): 이 지역 별미
- 야쿠시마 차(お茶): 섬에서 자란 녹차
야쿠스기 랜드: 가볍게 걷고 싶다면
조몬스기도, 시라타니운수이쿄도 체력이 부담된다면 야쿠스기 랜드(ヤクスギランド)가 있다. 30분 코스부터 최대 210분 코스까지 선택지가 다양하다. 천년 삼나무들 사이를 걷는 산책로가 잘 정돈돼 있어서 등산이 처음인 사람에게도 편하다.
- 입장료 500엔
- 30분 코스: 짧지만 야쿠스기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 시원한 계곡, 흔들다리, 거대 삼나무가 차례로 등장
야쿠시마 여행 전 꼭 알아야 할 것들
- 날씨 확인 필수: "한 달에 35일 비"라는 말처럼 날씨 변화가 크다. 트레킹 당일 기상 예보를 반드시 확인하자. 장대비가 내리면 계곡 수위가 급격히 오른다
- 트레킹 장비: 트레킹화, 우비(판초 형태 추천), 스틱. 샌들이나 운동화로는 무리다
- 화장실: 조몬스기 코스 중간에는 화장실이 없다. 등산 전에 반드시 해결할 것
- 식량: 등산 하루 전날 슈퍼마켓에서 도시락과 행동식(초코바, 에너지바)을 구입해야 한다. 산속엔 편의점이 없다
- 야생동물에게 먹이 금지: 사슴과 원숭이가 아무리 귀여워도 먹이를 주면 안 된다. 섬 전체의 생태계 균형을 위한 규칙이다
- 등산로 이탈 금지: 이끼 보호를 위해 지정된 등산로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야쿠시마를 가야 하는 이유
일본에 이런 섬이 있다는 걸 아는 한국 사람이 많지 않다. 오사카, 도쿄, 교토에 익숙한 사람들이 야쿠시마를 처음 마주할 때의 표정이 있다. 비현실적이라는 표정.
7,200년을 살아온 나무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된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이 나무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여기 있었고, 에도 막부가 무너져도 여기 있었고, 지금도 여기 있다.
포켓몬스터의 루네 시티, 원령공주의 원시림—수많은 창작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직접 와보면 이해가 된다. 이곳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고요함이라고 해야 할까.
가고시마 공항에서 비행기로 35분. 생각보다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