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역에서 지하철로 10분. 화려한 네온사인도, 줄 선 관광객도 없다. 아직 신주쿠구인데, 눈앞에는 프랑스 빵집과 이시다다미 골목이 펼쳐진다. 가구라자카(神楽坂)다.
한국인 여행자 중에 가구라자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사쿠사, 시부야, 신주쿠 3대 코스에 밀려 지도 바깥에 방치된 동네. 그래서 더 좋다. 이곳은 도쿄에서 몇 안 남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가구라자카, 이름의 뜻부터 알고 가야 한다
한자로 神楽坂. 직역하면 '신들이 음악을 즐기는 언덕'. 실제로 걸어보면 이름이 딱 맞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오래된 나무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어디선가 청아한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에도성 해자(moat) 바깥에 위치한 지역으로, 수백 년간 귀족과 지식인들이 드나들던 고급 유흥 지구였다. 20세기 초에는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샤 지구로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그 흔적이 골목골목에 남아 있다.
지금의 가구라자카를 특이하게 만드는 건 일불(日佛) 문화의 공존이다. 프랑스일본학원(Institut Franco-Japonais de Tokyo)과 프랑스일본고등학교가 이 동네에 자리 잡으면서, 프랑스 교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쿄에서 프랑스 빵집, 카페, 치즈 가게가 가장 많이 밀집한 동네가 됐다. 에도 시대 게이샤 골목에 들어서면 갑자기 파리 분위기다.
가는 법
- 이이다바시역(飯田橋駅): 도쿄메트로 도자이선·유라쿠초선·난보쿠선, 도에이 오에도선 모두 정차. B4b 출구로 나오면 가구라자카 도리(坂)까지 도보 1분. 여러 노선이 교차하므로 어느 방향에서 오든 이용하기 편하다.
- 가구라자카역(神楽坂駅): 도쿄메트로 도자이선. 메인 스트리트 중간 지점에 위치. 이이다바시역에서 출발해 언덕을 걸어 올라가다 가구라자카역에서 마무리하는 코스가 가장 자연스럽다.
신주쿠역에서 약 10분, 시부야역에서 약 20분. 아사쿠사나 우에노 가는 코스에서도 살짝 벗어나면 들를 수 있는 거리다.
아카기 신사 — 신주쿠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사
이이다바시역 B4b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이 아카기 신사(赤城神社)다. 첫눈에는 '이게 신사가 맞나?' 싶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주홍빛 도리이나 오래된 목조 건물이 아니다.
설계자가 구마 겐고(隈研吾)다.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로,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신사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유리 파사드와 연한 목재 내부가 결합된 구조는, 일반 신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경내는 넓지 않지만 조용하고 맑다. 모지아오이(문장 아오이)가 제철을 맞으면 애니메이션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신사 안에 카페도 있고, 경내 로스(los)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을 수도 있다.
- 위치: 도쿄 신주쿠구 아카기모토마치 1-10 (이이다바시역 B4b 출구 도보 3분)
- 입장: 무료, 상시 개방
가구라자카 도리 —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이유
이이다바시역에서 가구라자카역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 가구라자카 도리(神楽坂通り)가 이 동네의 척추다. 900m 남짓한 거리에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화과자점이 빼곡하다.
메인 스트리트만 보고 끝내면 반만 본 것이다. 진짜는 양쪽으로 뻗은 골목들이다. 특히 여러 요코초(横丁, 골목)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혼다 요코초 · 효고 요코초 · 이시다다미 골목
가구라자카 도리에서 옆으로 빠지면 이시다다미(돌바닥) 골목들이 나온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 오래된 나무 울타리, 이끼 낀 돌담. 이 골목들이 수백 년 전 게이샤들이 왕래하던 길이다.
이른 아침이나 평일 저녁에 오면 거의 혼자 걸을 수 있다. 관광지화됐지만 아직 사람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가 있다는 뜻이다.
게이샤 코미치 (게이샤 골목)
게이샤들이 연회 장소로 이동하던 루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출발점은 '켄반(検番)', 즉 게이샤 등록소였던 건물 앞이다. 이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특수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지금도 가구라자카에는 오차야(お茶屋, 게이샤 접객 공간)가 영업 중이다. 물론 일반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는 완전 초대 형식이지만, 골목을 걷다 보면 그 입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먹거리 — 여기 오면 뭘 먹어야 하나
고주 니쿠만 — 본점의 니쿠만
가구라자카 도리 중간 즈음에 있는 고주(五十番) 니쿠만 본점. 편의점 니쿠만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기 것은 크기부터 다르다.
- 미니 사이즈: 120g, 470엔
- 대형 사이즈: 240g (본점 한정)
- 종류: 돼지고기 기본, 새우, 채소 등 다양
들고 걸으면서 먹는 것이 맞다. 자리가 없다. 그냥 걸으면서 한입씩 먹고 계속 이동하는 방식. 가구라자카 스타일이다.
프랑스 빵집들 — 도쿄에서 가장 믿을 만한 바게트
가구라자카에 프랑스 베이커리가 왜 이렇게 많냐고 물으면, 프랑스 교민들이 오래 살아왔다고 답할 수 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따라온 것. 결과적으로 이 동네의 프랑스 빵 수준은 도쿄 내 다른 지역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높다.
- 크루아상 샌드위치, 바게트 샌드위치, 마카롱, 사워도우
- 폴(Paul)을 포함해 여러 프랑스 계통 베이커리가 산재해 있음
- 아침 일찍 오면 갓 구운 걸 바로 살 수 있음
르 브르타뉴 — 일본 최초의 갈레트
카페 크레페리 르 브르타뉴(Le Bretagne). 일본에서 처음으로 갈레트(galette, 메밀 크레페)를 선보인 곳이다. 갈레트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음식으로,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를 써서 만드는 짭짤한 크레페다.
좌석에 앉아 주문하는 레스토랑 형식. 점심 시간이나 주말은 예약하거나 웨이팅이 필요하다. 식사 크레페 1,800~2,200엔 선.
라쿠잔 — 제대로 된 일본 차
말차 라테만 마셔왔다면 라쿠잔(楽山)에서 생각을 좀 바꿔볼 수 있다. 일본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좋은 찻잎만 취급하는 전문점으로, 교토산 말차는 물론 교쿠로(玉露), 호지차, 겐마이차까지 직접 시음하며 고를 수 있다.
차를 담는 도구도 판매한다. 선물용으로도 좋고, 자신이 쓸 것으로 사도 좋다. 우유 넣은 라테 말고, 그냥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방식부터 경험해볼 것을 권한다.
라카구 — 쇼와를 지나온 창고가 문화 공간이 됐다
1965년에 지어진 창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2014년에 오픈한 라카구(la kagu). 전통 창고 특유의 육중한 외관을 유지하면서 내부를 현대적으로 바꿨다.
안에는 이것저것 있다. 일본 전통 기물을 파는 가게, 각 지역 양념과 조미료 판매 공간, 기념품 코너. 2층 오픈 공간에서는 팝업 행사나 강연이 수시로 열린다. 방문할 때마다 다른 내용의 팝업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일정을 확인하고 가면 더 좋다.
- 쇼와 시대 분위기를 느끼면서 현대 일본 공예품이나 식재료 쇼핑 가능
- 관광지의 기념품숍과는 다른 결
젠코쿠지 절 — 1595년부터 이 자리에
가구라자카 도리 한가운데에 비샤몬텐(毘沙門天) 신을 모시는 젠코쿠지(善國寺)가 있다. 159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세워진 불교 사원이다. 400년이 넘었다.
석조 호랑이 한 쌍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매년 1월, 5월, 9월의 신수이초(寅の日, 호랑이 날)에는 큰 행사가 열린다. 아와오도리 같은 지역 축제 때는 이 절 앞이 무대가 되기도 한다.
입장 무료, 경내 자유 관람 가능.
카날 카페 — 운하 옆에서 보내는 오후
가구라자카 도리 끝, 이이다바시역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카날 카페(Canal Café)가 있다. 운하를 직접 내려다보는 테라스 좌석이 포인트다.
- 보트 대여: 1,000엔/30분. 두 명이 카누처럼 탈 수 있는 소형 보트.
- 테라스 음식: 젤라토, 캐모마일 차 등. 모든 걸 합산해도 두 명에 2,000엔 이내로 가능.
- 식사 공간: 실내 다이닝 섹션에서 피자, 파스타, 쌀국수(pho) 메뉴 있음.
- 노 테이블 차지, 노 서비스 피: 추가 요금 없음.
봄에는 운하 주변 벚꽃이 만개한다. 레스토랑 쪽 자리는 벚꽃 시즌에 예약이 꽉 차지만, 테라스 데크는 선착순이라 이른 시간에 오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가다가 지쳤을 때 앉아서 기차 지나가는 거 보며 쉬는 곳으로도 손색없다. 소부선과 주오선이 가까이 지나가서 열차 조망이 꽤 좋다.
가구라자카 축제 3개 — 한 번쯤 타이밍 맞춰볼 만하다
아와오도리 (7월)
도쿠시마에서 시작된 전통 민속무용 아와오도리(阿波踊り)가 7월 중순에 가구라자카 도리 전체를 점령한다. 수십 개 팀이 일렬로 춤추며 내려오는 광경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들다. 도쿄 내 아와오도리 개최지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곳 중 하나다. 2024년 기준 7월 셋째 주 주말에 열렸다.
바케네코 축제 (가을)
바케네코(化け猫, 요괴 고양이) 축제. 일본 민간 설화에서 고양이는 나이 들면 인간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이 전설을 축제로 만들었다. 참가자는 고양이 코스튬을 입어야 한다. 구경만 해도 되고, 코스튬만 걸치고 따라 걸어도 된다. 어떤 일본 여행에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다.
가구라자카 스트리트 스테이지 오에도 투어 (여름)
가구라자카 전체를 무대로 삼는 전통 공연 축제다. 샤미센(三味線), 코토(琴) 같은 전통 현악기 연주와 일본 전통 예술 공연이 골목 곳곳에서 동시에 열린다. 살아있는 연주로 샤미센 소리를 들을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와보면 안다.
💡 꿀팁 모음
- 📅 평일 오전이 최적: 주말 오후는 메인 스트리트가 혼잡해진다. 평일 오전 10~12시 사이가 가장 여유 있다.
- 🚫 메인 스트리트만 보지 말 것: 골목을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길을 잃어도 결국 메인 스트리트로 나온다. 주저 없이 들어갈 것.
- 🍞 아침 일찍 오면 갓 구운 빵: 가구라자카 베이커리들은 이른 아침부터 영업하는 곳이 많다. 오전 8시에도 열려 있는 곳이 있다.
- 🚃 이이다바시→가구라자카 방향으로 걷기: 언덕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향.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다. 내려올 때는 골목으로 빠지면 된다.
- 📱 Google Maps 너무 믿지 말기: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지도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방향감각을 믿고 걸어라.
- 🌸 벚꽃 시즌: 카날 카페 주변은 벚꽃 시즌에 도쿄 내에서도 손꼽히는 포인트. 레스토랑 예약은 1~2주 전에.
- 💴 현금 준비: 작은 가게들은 카드 안 받는 곳이 있다. 최소 5,000엔은 현금으로 갖고 다닐 것.
⚠️ 이것만은 주의하자
- 가구라자카 주변은 주택가이기도 하다. 큰 소리로 떠들거나 골목에서 음주하는 건 민폐다.
- 오차야(게이샤 접객 공간) 입구는 사진 찍을 수 있지만 무단 침입은 안 된다.
- 일부 이시다다미 골목은 사유지다. 막혀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 반나절 추천 코스
이이다바시역 B4b 출구 → 아카기 신사 (20분) → 가구라자카 도리 이시다다미 골목 탐방 (40분) → 게이샤 코미치 (20분) → 고주 니쿠만 (간식) → 젠코쿠지 절 (15분) → 라카구 (30분) → 라쿠잔 차 한 잔 → 카날 카페에서 마무리 (30분)
총 3~4시간. 카페에서 쉬는 시간 빼면 2.5시간. 신주쿠나 시부야와 연계하기 좋은 위치다.
다음에 도쿄에 간다면, 화려한 스팟 중에 하나를 지우고 가구라자카를 넣어봐라. 예약도 필요 없고, 줄도 안 서고, 그냥 걸어다니면 된다. 어쩌면 도쿄에서 가장 쉽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반나절이 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