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을 보러 간다는 건
일본 여행을 몇 번 다녀오면, 어느 순간 시선이 바뀐다. 맛집도 좋고 쇼핑도 좋지만,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성(城) 앞에서 발이 멈추는 순간이 온다. 콘크리트로 재건한 성은 솔직히 박물관에 가깝다. 하지만 에도 시대 그대로의 나무 기둥, 삐걱거리는 계단, 화살 구멍까지 남아 있는 '진짜 성'은 다르다.
일본 전국에 성은 수백 개가 있지만, 에도 시대 이전에 지어진 천수각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딱 12개. 그중에서도 국보로 지정된 다섯 곳, 이른바 국보 5성은 일본 성 여행의 정점이다.
국보 5성, 뭐가 다른가
'현존 12천수'란 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일본에 수많은 성이 있지만 전쟁, 화재, 지진, 메이지 유신의 폐성령을 모두 버텨낸 천수각은 12개뿐이다. 그중 건축적·역사적 가치가 압도적인 다섯 곳이 국보 지정을 받았다.
- 히메지성(兵庫) — 백로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일본 성의 교과서.
- 마쓰모토성(長野) — 까마귀성. 검은 외벽과 북알프스의 조합.
- 이누야마성(愛知) — 현존 최고(最古) 천수각 논쟁의 중심. 기소강 절벽 위.
- 히코네성(滋賀) — 비와호를 품은 아담한 명성. 히코냥의 고향.
- 마쓰에성(島根) — 산인 지방의 고독한 흑성. 2015년 국보 승격.
① 히메지성 — 한 번은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일본 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순백의 외벽 때문에 '백로성(白鷺城)'이라 불린다. 1993년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400년 넘게 원형을 유지한 기적 같은 건축물이다.
밖에서 보면 5층, 안에 들어가면 지상 6층+지하 1층. 이 구조부터 이미 속임수다. 적에게 규모를 착각하게 만드는 설계였다. 지하에서 꼭대기까지 관통하는 두 개의 대들보(동·서 심주)가 약 25m 높이로 건물을 받치고 있는데, 한쪽은 도중에 두 나무를 이어 붙인 이음새가 남아 있다.
방어 장치가 미쳤다
- 사마(狹間) — 벽에 뚫린 네모·세모·동그라미 구멍. 총과 활을 쏘기 위한 것. 각 모양마다 담당 병사가 정해져 있어서 전투 시 즉시 배치됐다.
- 비밀 사마 — 겉에서 보면 하얀 벽 그 자체. 문짝 표면까지 흰 칠을 해서 구멍이 있는지 바깥에서는 절대 모른다.
- 이시오토시(石落とし) — 바닥에 난 뚜껑을 열면 바로 아래의 적에게 돌을 떨어뜨릴 수 있다. 동시에 비밀 사마로 먼 적도 공격 가능.
- 미로 같은 동선 — 천수각을 향해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내리막이 나온다. 적이 길을 헤매는 사이 위에서 공격하는 구조.
오키쿠 우물 전설
성 안에 있는 우물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반역을 꾸미던 가신의 음모를 주군에게 알린 시녀 오키쿠가, 보복으로 접시 분실 누명을 쓰고 이 우물에 던져졌다. 밤마다 "한 장, 두 장…" 접시 세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괴담 중 하나의 무대가 바로 여기다.
실전 정보
- 입장료: 성인 1,000엔 (고코엔 공통권 1,040엔). ⚠️ 2026년 4월부터 2,500엔으로 인상 예정
- 운영시간: 09:00~17:00 (입장 마감 16:00)
- 접근: JR 히메지역 도보 20분. 오사카에서 신쾌속 약 1시간 30분, 신칸센 약 40분
- 소요시간: 천수각 내부까지 약 2~3시간
- 💡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있음. 현지 가이드 투어도 한국어로 가능한 경우 있으니 사전 확인 추천
② 마쓰모토성 — 검은 성과 알프스의 조합
히메지성이 백로라면, 마쓰모토성은 까마귀다. 검은 외벽과 하얀 회벽의 대비가 인상적인데, 배경으로 펼쳐지는 북알프스 산맥과의 조합은 일본 성 중 최고의 포토 스팟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4년경 축성이 시작됐고, 현재의 천수는 1593~1594년에 지어졌다. 5층 6계 구조. 특이한 건 전투용 천수에 달빛을 감상하기 위한 '츠키미야구라(月見櫓)'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증축된 흔적이다.
실전 정보
- 입장료: 성인 1,200엔 (전자 티켓) / 1,300엔 (현장)
- 운영시간: 08:30~17:00 (골든위크·여름 08:00~18:00)
- 접근: JR 마쓰모토역 도보 약 10분. 도쿄에서 특급 아즈사로 약 2시간 30분
- 💡 성 주변 나와테 거리·나카마치 거리에서 소바, 전통 공예품 쇼핑 가능. 반나절 일정으로 딱 좋다
③ 이누야마성 — 나고야에서 30분, 가장 오래된 천수
기소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다. '현존 최고(最古)의 천수각'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마쓰모토성과 논쟁이 있지만, 무로마치 시대(1537년)에 지어진 목조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국보 5성 중 가장 작고 소박하다. 하지만 최상층 전망대에 올라 기소강 계곡을 내려다보는 순간,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 수 있는 구조라 스릴도 있다.
성 아래 마을이 본체
이누야마 조카마치(城下町)는 에도 시대 분위기를 잘 살린 거리로, 기모노를 빌려 입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코 이나리 신사의 핑크 하트 소원석, 마치야를 개조한 카페와 가게들. 성 자체보다 이 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사람이 많다.
실전 정보
- 입장료: 성인 1,000엔
- 운영시간: 09:00~17:00 (입장 마감 16:30)
- 접근: 메이테쓰 이누야마역 또는 이누야마유엔역 도보 약 20분. 나고야에서 전철 약 30분
- 💡 나고야 당일치기로 최적. 오전에 성 + 오후에 조카마치 산책이면 충분
④ 히코네성 — 비와호 옆 아담한 보석
국보 5성 중 가장 아담하지만, 가장 '아기자기한' 성이다. 비와호(琵琶湖) 바로 옆에 자리 잡아 천수각에서 호수 전망이 열린다. 에도 시대 이이 가문의 거성으로 270년간 한 집안이 지켜온 드문 사례.
세 가지 다른 양식의 파풍(破風)이 한 건물에 모여 있는 독특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성 옆 겐큐엔(玄宮園)에서 바라본 히코네성은 일본 정원과 성의 조합으로 최고의 사진을 남길 수 있다.
히코냥을 놓치지 마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자체 마스코트 중 하나인 '히코냥(ひこにゃん)'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매일 성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등장하는데, 이 고양이 캐릭터를 보기 위해 성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전 정보
- 입장료: 성인 1,000엔
- 운영시간: 08:30~17:00 (연중무휴)
- 접근: JR 히코네역 도보 약 15분. 교토에서 JR 신쾌속 약 50분
- 💡 해자를 도는 야가타선(유람선) 약 45분간 운행. 성을 수면에서 올려다보는 독특한 경험. 유메쿄바시 캐슬 로드에서 오미규 코로케도 꼭 맛볼 것
⑤ 마쓰에성 — 산인 지방의 고독한 흑성
2015년에 국보 승격된 가장 '최신' 국보 성. 시마네현 마쓰에시에 있다. 솔직히 접근성이 좋지 않다. 도쿄에서 직항 비행기로 1시간 20분이거나, 오사카에서 열차로 4시간 넘게 걸린다. 하지만 그래서 좋다. 관광객이 적고, 성 주변의 호리카와(堀川) 유람선을 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검은 천수각 내부에는 실전을 의식한 장치들 — 이시오토시(돌 떨어뜨리기), 급경사 계단, 무기 보관실 — 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상층에서 보이는 신지호(宍道湖) 석양은 '일본 석양 100선'에 꼽히는 절경.
실전 정보
- 입장료: 성인 680엔
- 운영시간: 08:30~18:30 (동절기 ~17:00)
- 접근: JR 마쓰에역 버스 약 10분. 오사카에서 야쿠모 특급 약 4시간
- 💡 호리카와 유람선은 11월부터 고타츠 설치. 겨울에도 따뜻하게 둘러볼 수 있다. 한국어 안내 방송 있음
국보 5성 루트 짜는 법
5성을 한 번에 다 돌 필요는 없다. 기존 여행 일정에 하나씩 끼워 넣는 게 현실적이다.
간사이 여행에 추가
오사카·교토 베이스라면 히메지성(오사카에서 신쾌속 1시간 30분)과 히코네성(교토에서 50분)을 각각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하루에 둘 다는 욕심이고, 각각 반나절씩 잡는 게 맞다.
나고야 여행에 추가
이누야마성은 나고야에서 전철 30분이니 반나절이면 충분. 성 + 조카마치 산책 + 점심까지 해결된다.
도쿄 근교 / 나가노 여행
마쓰모토성은 도쿄에서 특급 아즈사 2시간 30분. 가미코치나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갈 계획이라면 경유지로 딱이다.
산인 지방 깊이 여행
마쓰에성은 이즈모타이샤(출운대사)와 묶어서 2박 3일 정도가 적당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관광객 없는 고즈넉한 일본을 만날 수 있다.
성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것들
- ⚠️ 신발: 천수각 내부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야 한다.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곳이 대부분. 슬리퍼가 아닌 양말 착용 추천 (겨울에는 발이 시리다)
- ⚠️ 계단: 현존 천수의 내부 계단은 각도가 60도 이상인 곳도 있다. 치마나 하이힐은 피할 것
- ⚠️ 대기시간: 벚꽃 시즌(3월 말~4월 초) 히메지성은 입장까지 1~2시간 대기도 흔하다. 개장 직후 도착 추천
- 💡 스탬프: 일본 100명성 스탬프 랠리 하는 사람 많다. 각 성 입구에 무료 스탬프 비치. 전용 스탬프 북은 아마존재팬에서 구매 가능
- 💡 가이드: 히메지성과 마쓰에성은 한국어 가이드 or 오디오 가이드 있음. 다른 성은 영어 팸플릿 정도
콘크리트 성과 진짜 성의 차이
오사카성, 나고야성, 구마모토성(현재 복구 중) 같은 유명한 성들은 사실 전후 콘크리트로 재건한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내부는 박물관이다. 이것들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400년 전 나무 기둥을 직접 만지고 삐걱거리는 바닥을 걸어본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현존 천수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시간'이다. 이 나무가 400년을 견뎠고, 이 벽이 전쟁과 지진과 태풍을 이겨냈다는 무게감. 관광지라기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다.
